-
목차
지시 불가능성의 서언
지시 불가능성의 서언은 불교 언어학이 전제하는 ‘말은 진리를 지시할 수 없다’는 사유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단지 언어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진리를 언어로 말하려는 모든 시도가 윤리적으로 문제적이며 인식론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점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다.
『금강경』의 핵심 문장인 *“법을 법이라 여기는 자는 곧 법을 보지 못한 자이다.”*는 지시적 언어 사용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담고 있다. 이는 언어가 어떤 실재를 지시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 자체가 무명(無明)의 구조임을 드러내는 말이다. 불교 언어학은 여기서 언어를 수행의 도구로 전환시키며,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수행적으로 사용하는 길로 나아간다.
소쉬르가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을 주장하고, 데리다가 그 자의성조차 해체하며 차연(différance)의 운동을 드러낸 것은 근대 언어학의 핵심 성과다.
불교는 이러한 서구 기호학보다 앞서, 언어가 진리를 담보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를 차단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자각하고 있었다. 『유마경』에서는 유마거사가 병의 본질을 묻는 문답 속에서 병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병의 실상을 드러내는 구조를 보여준다.
불교 언어학은 말이 진리를 전달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하여, 말의 실패를 인정하고 실패 그 자체를 수행의 통로로 삼는 비고정적 언어 실험을 전개한다. 언어는 실패할 때, 진리에 도달하지 않음으로써, 그 진리의 그림자 속에서 감응을 유도하는 경로가 된다.
말과 실재의 불합치: 언어는 진리를 왜곡하는 구조다
말과 실재의 불합치는 불교가 언어를 단순히 무력하다고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재를 왜곡하는 장치로 간주하는 점에 초점을 둔다.
불교에서 실재(實在)는 언어로 기술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언어는 지각의 작용, 인식의 습관, 사유의 집착이 개입된 ‘가합(假合)’의 형태에 불과하다.
『반야심경』에서 반복되는 “무”의 언어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 모두가 실체가 아님을 선언하는 해체적 지시 구조이다. 언어로 존재를 열거하는 동시에 그 존재들이 모두 언어를 통해 소멸되도록 설계된 기호의 탈지시적 배열 전략이다.
라캉은 실재계(the Real)는 상징계(symbolic order)를 통해 포착되지 않으며, 언어는 실재를 왜곡하며, 실재는 언어의 균열 속에서만 발생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색즉시공' 구절은 그 점을 극명히 보여준다. 색은 공이며, 공은 색이지만, 이 동일화는 지시 행위의 파괴와 그 파괴를 통한 새로운 인식의 도입을 의미한다.
말은 실재를 명명하지 못하며, 명명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무명을 강화하는 고정화를 초래한다. 불교는 이 언어의 위장을 걷어내기 위해 문장 내에 의도적인 비논리를 도입하고, 수행자에게 언어에 대한 신뢰를 무화시키는 교육적 충격을 부여한다. 그 결과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라, 실재와의 거리를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 된다.
언표적 공백의 윤리
언표적 공백의 윤리는 침묵과 비발화가 불교 언어 구조 안에서 가장 깊은 윤리적 행위로 작용하는 구조를 분석한다.
『열반경』에서 부처는 “묻는 이 없거든 나는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말이 진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한 말의 절제미다.
『조사선사어록』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조주, 차 한 잔 하고 가게”라는 말은 질문자에게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고, 말이 아닌 감응과 행위, 리듬의 방식으로 수행적 전이를 유도한다.
말하지 않음은 진리를 말하지 않기 위한 말로 구성되며, 발화의 부재는 오히려 의식의 열림으로 기능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마지막 문장,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와도 상응한다.
그러나 불교는 침묵을 윤리적 선택으로 넘어서 그 자체가 진리 구현의 방식이 되도록 문법과 언표 구조를 재설계한다. 침묵은 단순한 말 없음이 아니라, 말의 자리를 비워 두기 위한 가장 철저한 발화이다.
불교 언어학은 침묵을 하나의 수행으로 전환시키며, 언표가 실패함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진리와의 접속을 가능하게 만든다. 말하지 않음이 말보다 더 강하게 의미를 작동시키는 구조가 바로 불교 언표윤리의 핵심이며, 이는 감응(感應)이라는 비기호적 전달 구조로 이어진다.
수행으로서의 지시 불가능성: 언어를 해체하며 진리에 다가서는 기술
수행으로서의 지시 불가능성은 언어의 실패를 인식하고, 그 실패 자체를 수행의 구조로 전화하는 불교 언어의 전략적 설계를 의미한다. 『임제록』과 『벽암록』 등 선문답 집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화두들은 전통적인 문답 구조를 의도적으로 붕괴시키며, 수행자에게 논리적 혼란을 통한 사유 해체를 유도한다.
“모든 법은 어디서 오는가?”
“마른 똥막대기다.”이와 같은 대답은 언표의 지시 기능을 중단하고, 질문 자체의 구조적 오류를 직면시키는 해체적 응답 방식이다.
언어가 진리를 전달할 수 없음을 이해한 수행자만이 이 부조리한 대화를 통해 자기 의식의 고정 지점을 무너뜨리고 감응의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불교 언어학은 수행 언어를 정보 전달이 아닌 정신적 구조 해체 도구로 전환하며, 말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수행이 개시된다고 본다. 말이 무너질 때, 존재가 드러나고, 지시가 중단될 때, 감응이 작동한다. 이것이 불교 수행에서의 언어의 역할이다. 지시 불가능성은 회피가 아니라, 고도로 설계된 철학적·수행적 문법이라 할 수 있다.
기호의 소멸 기획: 의미를 남기지 않기 위한 말의 역설
기호의 소멸 기획은 불교 언어가 언어 자체를 ‘자기 소멸 장치’로 설계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는 언어윤리의 구현을 의미한다.
『능엄경』이나 『화엄경』은 동일한 단어와 문장을 수십 번 반복하며, 그 반복이 의미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제거하고 무화하는 과정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반복은 무의식적으로 의미를 ‘지우기 위한 리듬’으로 작용하며, 기호가 스스로를 자해함으로써 의미를 사라지게 만드는 언어 철학의 구현체라 할 수 있다.
데리다가 말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선언이 기호 체계의 무한성이라면, 불교는 “텍스트 밖에서만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며, 의미 없는 반복을 통해 텍스트 그 자체를 붕괴시킨다.
‘색즉시공’은 단지 개념의 등식이 아니라, 언어 기호가 의미를 포기하면서도 진동을 남기는 방식이다. 기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또는 모순을 겹침으로써, 말이 남기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정한다. 불교적 말하기는 의미가 아닌 침묵의 잔향을 남기기 위한 설계다. 이 잔향이 바로 진리를 향한 감응의 진동이 된다.
불교적 지시 불가능성 맺음말: 언어의 실패가 진리의 문을 여는 순간
불교적 지시 불가능성은 말로 진리를 지시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시의 불가능성을 철저히 체험함으로써 진리를 수행하는 언어윤리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글은 언어의 실패, 의미의 파괴, 침묵의 윤리, 수행의 화두 구조, 기호 해체의 전략 등을 총체적으로 분석하였다.
말이 실패할 때 수행은 시작된다.
말하지 않음이 말보다 더 큰 말을 생성한다.
이것이 불교 언어학이 제시하는 최종의 문법이자, 수행으로서의 말의 철학이다.
'불교 언어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 언어의 중도적 논리 문장 전략 (0) 2025.06.03 무(無)의 의미론 (0) 2025.06.03 존재의 다층 구조를 말하는 기술 오온의 언어학 (0) 2025.06.02 불교의 감응 : 비언어적 전이 (0) 2025.06.02 개념어의 무상성 (0) 2025.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