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사유

불교 언어학으로 시작해 말하지 않음의 정치학까지 아우르며 디지털 시대의 불교적 성찰을 해 보려 합니다

  • 2025. 6. 3.

    by. 지성 민경

    목차

      1. 침묵윤리학: 발화를 유예하는 불교적 존재 감각

      침묵윤리학은 불교에서 말하지 않음, 즉 침묵이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수행적 진실을 담는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일반 윤리학에서 말은 진실을 말하거나 거짓을 피하는 도덕적 행위로 간주되지만, 불교 윤리에서는 '진실함'이란 말 이전의 상태, 곧 침묵을 지킬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법구경』에는 "입을 닫고 마음을 고요히 하면, 말보다 깊은 진실이 드러난다"라고 설파된다. 이는 불교에서 침묵이 수행의 일환이자 자비의 표현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침묵은 상대의 무지를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앎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생명에 대한 존중을 실천하는 윤리적 행위다.

      현대 언어윤리학에서는 발화를 통해 권력, 감정, 정보가 분산된다고 본다. 그러나 불교의 침묵윤리학은 그 반대로, 비발화 자체가 해탈을 향한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 침묵은 회피도, 소극성도 아닌 ‘언어적 절제에 기초한 윤리적 선택’이며, 진리를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품는 자세로 확장된다.

       

      침묵설법의 윤리구조
      침묵설법의 윤리구조

       

       

      2. 진실무발화: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수행적 명제

      진실무발화는 불교에서 언어적 발화를 최소화하거나 유보함으로써 오히려 더 명확하고 깊은 진실을 전달하는 수행 언어의 한 형식이다. 언어 자체의 한계를 자각하고, 말의 권위를 말의 유예를 통해 전복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선종에서 자주 보이는 무언답(無言答)은 이러한 구조를 잘 보여준다.

      제자가 질문을 던질 때 스승이 침묵하거나, 단지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행위는 의미 없는 행위가 아니라, 말 너머에서 진실을 깨닫게 하는 문턱의 제시다. 말은 없지만, 그 비어 있음은 질문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지며, 수행자는 언어가 아닌 존재적 울림을 통해 진리를 체험한다.

      진실무발화는 현대 철학의 ‘표현 불가능한 것에 대한 암시적 발화(implied proposition)’ 개념과 유사하다.

      불교 언어윤리는 이와 같은 구조를 **의도된 비언어적 명제(intended non-verbal assertion)**로 읽으며, 말의 부재 자체를 ‘가장 진실한 말하기’로 전환시킨다. 이 윤리는 언어적 신중함이 아닌, 존재적 조율로서 작동한다.

       

      3. 자비적 언어삼가: 말의 영향력을 인식한 불교적 절제 전략

      자비적 언어삼가는 불교적 언어윤리에서 중요한 수행 덕목 중 하나로, 말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깊이 인식하고,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자비 기반의 언어 절제 전략이다.

      팔정도 중 ‘정어(正語)’ 항목은 이를 핵심 수행 요소로 명시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필요 없는 말조차 하지 않도록 가르친다.

      불교 경전에서는 ‘쓸데없는 말’이나 ‘두 갈래 말’을 삼가라고 거듭 강조되며, 이는 단지 사회적 예절이 아니라 언어가 윤회를 구성하는 인연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말은 업(業)이 되고, 그 업은 다시 수행자 자신의 의식을 규정하게 된다.

      자비적 언어삼가는 현대 커뮤니케이션 윤리학의 ‘소통 행위 책임성(communicative accountability)’ 개념과도 접점을 이룬다. 불교는 말의 발생 이전에 이미 ‘자비적 침묵’이 성립될 수 있으며, 진실은 반드시 말로 표현되어야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언어윤리는 곧 존재윤리이며, 말의 선택은 곧 존재의 방식이다.

       

      4. 공적 언어절제: 말이 비워질 때 진리가 드러나는 구조

      공적 언어절제는 불교 언어윤리에서 수행적 개념인 ‘공(空)’을 기반으로 언어 사용 자체를 절제하는 태도다.

      단순히 말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실체화하지 않기 위한 말의 구조적 비움을 실천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는 반복적으로 "내가 설한 법은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언어의 절제가 단지 형식적 침묵이 아니라, 말속에서 실체를 비우는 방법론임을 시사한다.

      공적 언어절제는 발화의 형식을 유지하되, 그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는 지시의 탈실체화 전략이다.

      절제는 현대 담론 윤리학에서의 ‘의도 없는 말하기’ 개념과는 달리, 깨달음을 향한 명확한 의도를 가진 비고정 발화로 이해된다. 수행자는 발화를 하되 의미를 붙들지 않고, 그 유동성 안에서 상대와 함께 진리 곁을 걷는 언어적 동행을 실천한다.

       

      5. 무구의 발화지점: 말과 침묵이 교차하는 진실의 실현 공간

      무구의 발화지점은 말과 침묵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수행적 지점으로 통합되는 불교적 언어윤리의 최종적 구조다.

      무구(無垢)는 말이 더럽혀지지 않고, 침묵이 소극적이지 않으며, 발화 자체가 진리와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언어가 더 이상 정보 전달이나 정서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투명한 반영이 되는 상태다.

      『화엄경』에서 묘법은 "말하지 않음으로 설해지고, 설함이 곧 말하지 않음이 된다"라고 선언한다.

      이 모순적 구조는 말과 침묵이 진리 앞에서 분리될 수 없는 수행적 지각의 총합체를 드러낸다.

      무구의 발화지점은 현대 수행심리학에서 말하는 ‘심층 의식의 공명 언어(resonant speech)’ 개념과 유사하며, 침묵이 진실보다 더 크고, 말이 침묵보다 더 고요한 역설의 공간이다.

      불교 언어윤리는 이 지점을 통해 수행자의 발화를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적 울림으로 전환시킨다.

       

      맺음말: 말하지 않음, 그 언어 바깥의 윤리

      불교적 언어윤리는 단순히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언제 말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존재적 선택을 다루는 심오한 수행 규율이다.

      ‘침묵윤리학’, ‘진실무발화’, ‘자비적 언어삼가’, ‘공적 언어절제’, ‘무구의 발화지점’은 모두 언어 사용이 아니라 언어 절제와 비움의 미학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을 탐구한다.

      오늘날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불교의 말하지 않음의 윤리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더 명확한 참여, 소극성이 아니라 더 깊은 진실, 침묵이 아니라 언어를 초월한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