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사유

불교 언어학으로 시작해 말하지 않음의 정치학까지 아우르며 디지털 시대의 불교적 성찰을 해 보려 합니다

  • 2025. 6. 3.

    by. 지성 민경

    목차

      1. 개념비의어 구조론: 공과 무의 기호적 출발점 비교

      개념비의어 구조론은 ‘공(空)’과 ‘무(無)’라는 불교 개념이 언뜻 유사해 보이지만, 언어적·개념적 구조상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는 틀이다. 일반적으로 ‘공’은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로, 연기(緣起)에 기반한 상대성의 구조를 지시한다. 반면 ‘무’는 특정 대상이나 성질의 부재를 의미하며, 공보다 더 정적인 음성학적 지시를 띤다.

      ‘무아(無我)’는 자아의 고정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며, ‘공’은 자아뿐 아니라 자아를 설명하는 개념마저도 조건화된 것임을 강조한다. 무는 단일 개념의 부정, 공은 개념 체계 전체의 관계적 해체를 가리킨다.

      언어 구조상 무는 ‘존재를 삭제하는 구조’이고, 공은 ‘존재의 규정성을 유보시키는 구조’다.

      이러한 차이는 기호학적으로도 유의미하다.

      ‘무’는 일반적으로 단일 기표와 단일 기의의 구조를 가지며, ‘공’은 복수 지시체 사이의 관계를 해체함으로써 기호의 작용 자체를 해명한다.

      개념비의어 구조론은 공과 무가 언어 내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비우는 언어’를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지시불가 역학구조: 공과 무의 발화 전제 비교

      지시불가 역학구조는 ‘공’과 ‘무’가 언어화되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문제 삼는 구조적 분석이다.

      불교에서는 이 두 개념 모두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한 언어적 실험의 일환으로 나타나며, 실재적 의미보다는 지시의 실패 그 자체를 드러낸다.

      ‘무’는 일반적으로 “A가 없다”는 형식으로 나타나며, 발화자의 지시 실패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무상(無常)”은 '항구적이지 않다'는 사실 지시이며, 그것은 특정한 개념을 부정하는 지시 가능한 부정어이다.

      ‘공’은 “A는 본질이 없으며, 그러므로 A가 존재하더라도 A는 본질이 아니다”라는 중층적 구조를 가진다. 이때 공은 지시를 시도하면서 동시에 그 시도를 해체하는 자기 붕괴적 구조를 갖는다.

      이런 차이는 ‘무’가 기표의 지시 실패를 유예하는 반면, ‘공’은 지시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는 탈기호적 구조임을 시사한다. ‘무’는 사실적 발화를 유지하되 방향성을 조정하는 기능이고, ‘공’은 언어적 행위 자체를 수행의 도구로 삼으며 지시 불가능성을 통해 사유 전환을 유도한다.

       

      3. 의미무화 문장체계: 개념 탈고정의 문법적 실험

      의미무화 문장체계는 ‘공’과 ‘무’가 문장 내부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그 문장 구조가 수행자에게 어떤 사유 변화를 유도하는지를 살펴보는 구조적 분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법이 아니라, 개념 해체의 문장 설계 방식이다.

       “모든 법은 공하다”는 문장은 전통 문법 구조상 명확한 주술 관계를 형성하지만, 그 의미는 주체도, 술어도 본질이 없음을 선언한다. 반면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문장은 ‘변화한다’는 명확한 기의 중심 구조를 가진다. ‘무’는 의미를 유보하지 않고 특정 방향으로 정렬시키는 반면, ‘공’은 의미 구조 자체를 붕괴시키는 문장적 이중 구조를 취한다.

      의미무화 문장체계는 불교의 문법 실험이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니라 인식 작용에 개입하는 수행적 문법임을 증명한다.

      불교 언어학에서는 이를 ‘열린 문장(open sentence)’으로 분류하며, 청자가 그 문장을 듣고 고정된 해석에 이르지 못하도록 설계된 유동 문법 구조로 해석한다.

       

      4. 기호공백 생성론: 공과 무의 비표현 전략 비교

      기호공백 생성론은 ‘공’과 ‘무’가 기호학적 맥락에서 어떻게 의미의 공백을 형성하는지를 비교하는 분석틀이다.

      불교는 두 개념 모두를 통해 실체적 언어를 넘어서고자 하며, 이는 의도된 표현의 회피로 나타난다.

      ‘무’는 단일한 표현을 소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구조상 기호를 단순히 비우는 것이며, 기표를 유지하면서 기의를 제거하는 일종의 의미 삭제 메커니즘이다. ‘공’은 기표-기의 전체 관계망 자체를 무화하며, 단일 기호가 아니라 기호 체계 전체를 부정한다. 이때 발생하는 기호공백은 단순한 무의미가 아니라, 무한 지연된 의미의 장(場)이다.

      이 구조는 특히 현대 예술기호학, 시각기호학과 유사하다.

      '무'는 캔버스를 비워 놓는 전략과 같지만, '공'은 관람자가 그 빈 캔버스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공은 ‘기호 없음’을 넘어 ‘기호 기대 자체의 무화’로 기능하며, 언어적 해탈 구조를 이루게 된다.

       

      5. 수행기호 윤리학: 의미를 말하지 않음으로 전달하는 불교적 언어작용

      수행기호 윤리학은 ‘공’과 ‘무’가 불교 수행자에게 단순한 철학 개념이 아니라, 수행적 실천으로서 언어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를 윤리적 맥락에서 조망한다.

      불교에서는 말이 진리를 직접 전달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말하지 않음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 한다.

      ‘무’는 이 윤리 안에서 욕망과 집착을 지우기 위한 해석 언어로서 사용된다.

      수행자는 ‘무상’, ‘무아’ 등의 개념을 통해 존재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버리고자 한다. 

      ‘공’은 수행 언어를 넘어 수행자의 의식 구조 자체를 바꾸는 지각 훈련 기호로 작용한다.

      공은 언어로서의 진리를 말하기보다, 언어의 무기능성을 수행자가 직접 체득하게 만드는 구조를 갖는다.

      수행기호 윤리학은 단순한 개념 이해가 아니라, 언어 사용 자체를 절제하고 비우는 수행적 윤리로 작동하며, 특히 언어를 버릴 준비를 갖춘 말만이 참된 가르침이 될 수 있다는 불교적 통찰을 실현한다.

       

       

      공과 무의 언어 구조 비교
      공과 무의 언어 구조 비교

       

      맺음말: 공과 무, 언어 구조 위에서 마주한 두 개의 침묵

      ‘공’과 ‘무’는 불교 사상의 핵심 개념이지만, 그 언어적 구조는 놀랍도록 다르며, 그 차이는 단순한 철학적 의미를 넘어 기호 작용, 문장 구조, 의미 생성 방식, 수행 언어 윤리까지 깊이 작용한다.

      ‘공’은 관계와 구조를 비우며 기호 체계 자체를 유예하는 반면, ‘무’는 단일 개념의 삭제를 통해 인식의 정렬을 꾀한다.

      ‘개념비의어 구조론’, ‘지시불가 역학구조’, ‘의미무화 문장체계’, ‘기호공백 생성론’, ‘수행기호 윤리학’으로 이어진 이 비교는 단지 학문적 분석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수행의 장으로 사용하는 불교 언어학의 정수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