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사유

불교 언어학으로 시작해 말하지 않음의 정치학까지 아우르며 디지털 시대의 불교적 성찰을 해 보려 합니다

  • 2025. 6. 3.

    by. 지성 민경

    목차

      1. 무기호의 사유틀: 불교적 ‘지시 거부’ 언어와 기호학의 역추적

      무기호의 사유틀은 불교 언어가 근본적으로 지시성과 기호성을 의심하거나 초월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구조에서 출발한다. 현대 기호학에서는 사인을 구성하는 요소로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가 필연적으로 연결되며, 의미는 이러한 연결의 체계적 반복을 통해 생성된다고 본다. 그러나 불교 언어학은 이 연결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자 한다.

      『금강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법이 법이 아니기에 법이라 한다”는 구절은, 기호 체계 자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내포한다. 사인이 더 이상 고정된 의미를 지시하지 않으며, 기호 작용의 불확정성 자체가 수행적 진리에 가깝다는 대승적 언어 구조를 보여준다.

      현대 기호학의 후기 구조주의는 이러한 구조에 근접한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신화적 기호화’가 이데올로기를 은폐한다고 지적했고, 불교는 이미 2천 년 전부터 언어와 기호가 욕망과 무명을 강화한다는 점을 자각해 왔다.

      불교적 무기호 사유는 기호 이전의 감각, 말 이전의 통찰, 사유 이전의 자각을 지향하며, 그로 인해 언어의 ‘침묵된 기능’을 전면화한다.

       

      2. 사인의 해체구조: 존재를 고정하지 않는 불교적 지시 해체

      사인의 해체구조는 불교 언어에서 기호적 작용이 실재를 고정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구성된 해체 전략을 뜻한다.

      불교에서 말은 실체를 지시하지 않으며, 모든 언어는 ‘무자성(無自性)’이라는 원칙 아래 근본적으로 텅 빈 구조로 작동한다.

      현대 기호학에서 드리다(Jean Baudrillard)는 사인의 복제와 반복을 통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시뮬라크르(simulacra)’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불교는 이러한 ‘과잉 의미화’의 문제를, 수행을 방해하는 언어적 장애로 보며, 이를 언어 내적 해체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공(空)’이라는 단어는 수행자의 인식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며, 고정된 의미 대신 ‘의미의 조건을 없애는 의미’로 작용한다. 이는 기호학의 탈기표(de-signification) 개념과 맞닿는다. 불교는 실재를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실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언어를 구성하며, 이때 말은 ‘사인을 닮은 비사인’으로 전환된다.

       

      3. 비사인 언어구조: 말하지 않음의 기호론적 의미

      비사인 언어구조는 발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생성하거나 지시적 함의를 구성하는 언어 이론이며, 불교의 ‘침묵’이나 ‘무언답(無言答)’은 그 전형이다.

      일반 기호학에서는 의미 생성이 기표-기의의 결합에서 발생한다고 보지만, 불교는 그 결합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거나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의미의 깊이를 구현한다.

      선종에서 전해지는 일화 중,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 가섭이 미소 지었고, 그 장면이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사인이 없이 진리가 전달된 경우이며, 언어학적으로는 ‘비사인적 의미작용(non-semiotic signification)’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 AI 커뮤니케이션, 시각 예술 기호 이론 등에서 ‘의도 없는 표현(intentional silence)’ 또는 ‘기호의 탈정형화’라는 연구 주제로 확장된다.

      불교는 이 기호 비지시 상태를 진리 탐구의 핵심으로 보며, 비사인을 통한 인식의 재구조화를 수행의 언어로 실현한다.

       

       

      불교와 현대 기호학
      불교와 현대 기호학

       

      4. 공기호 전략: 의미를 비우는 수행 언어의 기호 설계

      공기호 전략은 불교 언어가 실체적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비움 자체를 설계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공기호’란 기호의 형식을 따르되, 그 안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무화하거나 부재로 유지하는 전략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형식적으로는 완전한 문장이지만, 그 내부에서 발생하는 기표와 기의는 상호 해체 구조를 이루며 자기 소멸적 기호체계로 작동한다. 이는 철학적 명제를 넘어, 실제 수행자의 언어 인식 방식을 전환시키는 기술적 장치다.

      현대 언어학에서 이러한 구조는 ‘음성 없는 지시’, ‘의미 없는 코드’로 분석되지만, 불교에서는 그것이 곧 진리에 가까운 언어 구조로 간주된다.

      공기호 전략은 수행자가 언어를 통해 언어를 버릴 수 있도록 안내하며, 지시되지 않음을 통해 실상을 가리키는 이중 구조를 구현한다.

       

      5. 기호초월 언어술: 언어를 넘어선 언어를 구현하는 불교적 수사법

      기호초월 언어술은 불교가 단지 기호를 해체하거나 유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언어 바깥에서 언어를 다시 구성하는 역설적 언어 기술을 의미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말의 틀을 넘어서고 다시 끌어오는 전략적 말하기다.

      『화엄경』, 『능엄경』 등에서 보이는 중첩적 문장과 ‘문장 너머의 문장’은 기호의 한계를 자각한 뒤, 수행을 통해 언어 바깥의 지각 구조로 진입하게 한다. 이는 현대 기호학의 ‘기호적 재귀성(semiotic recursion)’과 유사하지만, 불교에서는 그것이 의식의 변화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보다 존재론적이다.

      기호초월 언어술은 단지 철학적 이론이 아닌 수행적 방법이며, 말은 수단일 뿐이지 진리가 아니다.

      이 수사법은 기호를 넘어 존재에 닿게 하는 윤리적 설계이자, ‘언어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수행’으로 귀결된다.

       

      맺음말: 말과 말 너머, 사인과 비사인의 중도에 선 불교 언어

      불교와 현대 기호학의 접점은 단지 언어 구조를 비교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기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진리에 접근하려는 방식 자체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불교 언어는 ‘사인을 사용하는 비사인’, ‘기호를 소거하는 기호’라는 독특한 형태로 발화되며, 기호학이 도달하지 못한 윤리적 침묵, 존재적 직관의 언어 구조를 실현한다.

      ‘무기호의 사유틀’, ‘사인의 해체구조’, ‘비사인 언어구조’, ‘공기호 전략’, ‘기호초월 언어술’로 이어지는 이 글의 흐름은, 불교가 단지 언어를 사용하는 종교가 아니라, 언어 자체를 수행의 장으로 전환한 기호학적 혁명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