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사유

불교 언어학으로 시작해 말하지 않음의 정치학까지 아우르며 디지털 시대의 불교적 성찰을 해 보려 합니다

  • 2025. 6. 1.

    by. 지성 민경

    목차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는 법: 공(空)의 문장 구조 실험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는 법: 공(空)의 문장 구조 실험

       

      1. 언어의 존재 편향성과 공(空)의 발화 역설

      언어는 본질적으로 존재 중심적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문장은 어떤 존재의 '있음'을 기술하거나 명명함으로써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책상이 있다”  “마음이 흔들린다” “고통이 느껴진다” 등의 문장은 ‘있음’을 전제로 구조화된다. 그러나 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空)’은 이 언어적 습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공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으며, 단순한 부재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있음과 없음의 이분법을 초월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하다’를 말할 수 있는가? 언어가 존재 편향적이라면, 존재하지 않음을 기술하는 문장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교 언어학은 이 모순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문장 구조 실험을 통해 새로운 발화 패턴을 시도한다. 그 핵심은 ‘기호의 붕괴’와 ‘문법의 탈중심화’에 있다. ‘공하다’는 서술은 대상이 비어있음을 말하는 동시에, 그러한 비어있음을 성립시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언어의 구조를 재소환한다. ‘비어 있음’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금 ‘무엇이 비어 있는가’를 묻는 주어, 목적어, 서술어를 필요로 한다. 이때 공의 언어는 결국 비어 있음을 설명하려다 다시 존재를 불러들이는 순환에 빠지며, 수행자는 그 순환의 무력함 속에서 언어를 초월하는 자각의 문으로 진입한다.

      2. ‘공’의 수행적 문법적 실험 : 부정 서술문의 파열 실험

      ‘공’을 표현하는 문법적 실험은 전통적인 ‘부정 서술문’의 경계를 흔들며 시작된다.

      일반적인 부정문 ― 예를 들어 “이것은 나무가 아니다” ― 는 ‘나무’라는 개념을 일단 호출한 뒤, 그것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이때 ‘나무’는 여전히 발화 속에 존재하며, 부정의 대상이 됨으로써 언어적으로 실체화된다. 불교 언어는 이러한 언어적 부정이 여전히 존재론적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은 “모든 것이 공하다”는 명제를 통해 이 부정문 구조의 존재 잔여를 해체하고자 하며, 사상적 문장 해체 실험을 전개한다.

      이러한 실험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사중구(四重句)’의 전략이다. “있다도 아니며, 없다도 아니고, 있다와 없다도 아니며, 있다도 없고 없다도 아니다”라는 네 겹의 부정은 단순한 문법을 넘어서, 언어 구조 자체의 붕괴를 유도한다.

      이는 단순한 부정 이상의 수행적 언술로 기능한다. 즉, 말함으로써 깨달음의 국면을 열고, 문장을 따라가다 언어의 한계를 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 문장은 개념 전달이 아니라, 독자를 그 개념의 부재성으로 인도하는 구조적 수행이다. 문법은 더 이상 의미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의미의 해체 과정 그 자체가 된다.

       

      3. 비어 있는 주어인 무아(無我)와 언어주체의 해체

      ‘공’의 언어는 단지 세계의 성질을 기술하는 차원이 아니라, ‘말하는 나’라는 주체의 존재 자체를 해체한다. 일반 언어에서 모든 문장은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화자(話者)’의 존재를 전제한다. 예를 들어 “나는 괴롭다”, “나는 본다”는 문장은 ‘나(I)’라는 주체가 인식과 감각의 중심에 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성립한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무아(無我) 사상은 이 언어적 중심축마저 비워내며, 언어 주체를 부정한다.

      이때 사용되는 언어 실험은 ‘비개인적 표현’이다. 예컨대 “고(苦)가 일어난다”, “식(識)이 흐른다”는 표현은 고통을 ‘나의 감정’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단지 일어나는 현상으로 기술한다. 여기서 주어는 사라지고, 사건(event)이 언어의 중심이 된다. 이처럼 불교의 문장 구조는 언어 주체를 비워내는 동시에, 존재론적 중심을 해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말하는 이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흐름과 관계의 구조이다. 언어가 어떤 실체를 고정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그 실체 없음(無自性)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4. 비기호적 전달 실험인  침묵, 응시, 그리고 감응의 언어

      ‘공’을 말하는 불교 언어는 때로 ‘말하지 않음’ 자체를 말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금강경』의 “말로써는 이를 표현할 수 없다”는 구절처럼, 불교 수행 문헌은 종종 언어의 부재를 진리 전달의 경로로 삼는다. 이는 언어가 지닌 기호적 한계를 정직하게 마주한 결과이다. 언어가 ‘공’을 설명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 그 자체를 수행의 도구로 삼자는 방향이다.

      불교에서는 수행자의 눈빛, 몸짓, 심지어 침묵마저도 하나의 언어로 작동한다. 이는 현대 기호학에서 말하는 ‘비기호적 커뮤니케이션’과 통한다. 선(禪) 문답에서 스승이 대답 대신 막대기를 휘두르거나, 문을 닫고 나가는 등의 행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진실을 ‘감응’의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방식은 불교 언어학이 언어학을 넘어서 ‘의사소통 존재론’으로 진입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말해지지 않음은 전달의 실패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전달 형식으로 받아들여진다.

       

      5. 탈기호 언어의 미래가 될 정보사회 속 공의 언어 윤리

      오늘날 정보사회는 의미의 과잉 시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해시태그, 키워드, 인공지능의 문장 생성 알고리즘 속에서 언어는 빠르게 소비되고, 진정한 사유의 기회는 축소된다. 이때 불교의 ‘공 언어’는 말의 속도를 늦추고, 언어의 탈중심화를 실천하는 대안적 철학이 될 수 있다. ‘의미를 말하는 법’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침묵하는 윤리’가 요청된다. 불교의 공 언어는 그 자체가 언어를 넘어선 윤리적 실천이 되는 지점에서, 현대 언어학과 정보철학을 새롭게 자극한다.

      불교 언어학은 단순한 문법 실험이 아니라, 언어가 어떻게 존재를 구성하고, 또 그 구성된 존재를 어떻게 해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총체적 사유이다.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기 위한 이 언어의 실험은 수행적이며, 실천적이며, 해체적이다. 침묵과 문장 사이, 기호와 감응 사이의 긴장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의 윤리 ― ‘비어 있으나 말할 수 있는’ 문장 구조 ― 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상상력이야말로 불교 언어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강력한 선물이다.

       

      ■ 맺음말: 말해지지 않음의 언어의 그 윤리적 미래를 위하여

      불교 언어학에서 ‘공(空)’은 단지 철학 개념이 아니라, 언어의 구조와 발화를 통째로 재구성하는 해체적 장치다. 존재를 말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했듯, 존재하지 않음을 진지하게 다루기 위해서도 새로운 언어 구조가 요청된다. 이 실험은 단순히 말의 모양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의 틀을 바꾸고, 인식론의 문법을 흔드는 일이다. 우리가 쓰는 문장이 곧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라면, 공의 언어는 세계를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살아가는 문법적 혁신이기도 하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더 적은 것을 이해하며, 더 적은 것을 진심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때 불교적 공의 언어는 '덜 말함'과 '비어 있음'의 철학을 통해, 존재의 진실한 면모를 드러내는 역설적 언어 윤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침묵과 단절이 아닌, 존재에 대한 가장 정직한 응시이며, 기호의 너머에서 다시 만나는 감응의 자리다.

      불교 언어학은 지금 이 순간, 단어를 다루는 모든 이들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정말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말의 관성 속에 갇혀 있는가?" 이 물음은 티스토리 블로그라는 디지털 공간에서도 유효하다. 콘텐츠가 정보 상품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언어의 존재론을 다시 물어야 한다. '공'을 말하는 법은 곧, '의미를 소유하지 않는 말하기'이며, 그것은 곧 언어의 윤리적 전환이다.

      이 글이 그 전환을 향한 한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당신의 문장 또한 ‘비어 있으나 가득 찬 말’이기를.